연년세세 年年歲歲 - 황정은
공모전 작품중의 하나로, 마땅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책을 구입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사랑이란 무엇일까
요즘 곰곰히 생각해보면 사랑은 두가지로 나뉘는데
1) 로맨스적 사랑
2) 가족적인 사랑
이 책에서는 우선 가족적인 사랑을 다루고 있고,
미워하고 싫어하면서도 항상 그자리에 있어주는
용서할 수 없지만 용서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이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디를 가더라도, 갑자기 사라지더라도 그 자리에 계속해서 있어주는 것
상처를 주고 받지만, 사랑하기에, 상처와 아픔을 허락하는것
도망가지 않는것.
그자리에 그대로 있어주는 것
나보다 상대방을 더 우선시 여기는것
자존심 부리지 않고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지는 것
상처를 허락하는 것
이 책의 여러 등장인물들은 서로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이해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한영진은 직장 동료들과 술을 마시면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흘리곤 했다. 엄마랑 각별했다, 하고 시작되는 그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몇시에 퇴근하든 엄마는 부엌에 불을 켜두고 나를 기다렸어.
다른 식구들이 다 자고 있어도 엄마는 자지 않았지. 매일 늦게까지 나를 기다렸다가 금방 지은 밥하고 새로 끓인 국으로 밥상을 차려줬어
그런데 엄마, 한만수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아.
그애는 거기 살라고 하면서 내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돌아오지 말라고
너 살기 좋은데 있으라고
나는 늘 그것을 묻고 싶었는데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수는 없다.
한영진은 오래전에 그 말을 들었고 중요한 선택을 할때마다 그 말을 지침으로 여겼다.
이순일도 그랬을 거라고 한영진은 생각했다.
........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것만 하며 사니
이순일은 그 말을 듣고 한세진의 표정이 싸늘해지는 걸 보았다. 애써 부드럽게 넘기려는 듯한 태도가 사라지고 가족 모두가 아는 그 표정, 이마가 평평해지고 눈꺼풀이 내려오며 말문을 닫는 얼굴이 되었다. 한영진도 입을 다물었다. 그것도 모두가 아는 표정이었다.
구제불능, 하고 도장을 찍고 더는 상종하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는 듯 한 얼굴. 싸움은 그렇게 중단되었다. 어렸을때에는,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이 아이들이 어렸을때는 다투거나 하면 즉시 개입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가능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릴 때만큼 자주 다투지는 않았지만 훨씬 신랄하고 내밀한 것을 두고 다투었다. 그게 무엇이든, 자기 손으로 건넨 것이 그 아이들의 손으로 넘어가 쪼개졌고 그 파편을 쥐고 있느라 아이들이 피를 흘리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아픔과 상처는 되물림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 악순환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다고 어느 심리 상담가가 하는 말을 들었다. 이순일은 자신이 어른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자식들에게 되돌려 주고 싶지 않았지만 머리 한구석 자리잡은 아픔과 상처들을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건넸을 것이고, 그녀는 최선을 다했지만 부족한 부분들이 딸들에게는 한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장녀 한영진은 어릴적 부터 가족을 위해 살았고,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착하지만 싸늘한 남편과 결혼했고 떠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부분에 부딛혀서 백화점 이불 판매원으로 살아간다. 장녀였기에, 엄마가 고생하는 것이 보기 힘들었기에 어릴적 부터 여러가지 고생을 일삼았고 나중에는 그것이 한이 되어 엄마에게 자신이 가진 상처를 드러낸다.
이순일은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간다. 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딸의 삶이 안타깝지만,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처럼 보인다.
몸이 부서저라 어릴때부터 일을 하면서 시집을 가고 아이들을 키우고.. 그 아이들이 커서도 그들을 조금이라도 챙겨주려고. 비록 따뜻한 말한마디 건네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녀만의 방식으로 그들을 걱정한다.
하지만 장녀와 막내아들(한만수) 에 대한 이슈는 대한민국의 누나-아들 구도로 이어진다.
아들이 귀했던 옛날에는 아들을 낳기 위해서 자식을 낳았고, 아들을 건승시키기 위해서 부모와 누나들이 뒷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집안 내부적으로도 적지 않은 차별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차별들을 수면위로 끌어올려서 공개적, 거칠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놓아 주지 못하는 엄마를 한탄하면서 '나도 좀 갈 수 있게 풀어주지 그랬어. 남동생처럼' 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한영진은 엄마를 이해하기에, 엄마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를 거부한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연년세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이해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엄마에게 미운감정이 많았다가, 어른이 되면서 그들을 이해하게 되는것. 그게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가족일지도 모르겠고.
그걸 계속 생각하다보면 내가 결국은 여기서, 벗어날 수 없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고. 어른이 되면 조금 더 많은 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먹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이미 떨어져 더러워진 것들을 입에 넣는일, 어쨋든 그것 가운데 그래도 각자가 보기에 좀 나아 보이는 것을 먹는 일, 그게 어른의 일인지도 모르겠어
그건 말하자면, 잊는 것일까. 내 아버지는 그것이 인생의 비결이라고 말했는데, 내게는 이상한 기억이 있었거든.
(엄마가 아기를 던지는 기억)
그 두사람때문에 괴로울때마다 아버지는 나더러 잊으래.
편해지려면 잊으래
살아보니 그것이 인생의 비결이라며. 그 말을 들었을땐 기막혀 화가 났는데 요즘 그 말을 자주 생각해. 잊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 잊어. 그것이 정말 비결이면 어쩌지.
잊는 것이 비결이면 어떡하지...
가끔 나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정신 장애인이었으면 좋겠고, 때로는 모르는게 약일 수도 있다는 생각
내가 치매가 걸리거나 아무 지능이 없으면 내 주변 사람들은 힘들겠지만, 적어도 내 마음은 편안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알고싶지 않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준 상처들은 아니어도, 엄마가 입은 상처를 나의 상처처럼 느끼기도 할때가 있고 그럴때면 분노하다가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하면 체념하기도 하면서 나는 살아가는 것 같다.
가끔은 시간이 약인지도 모르겠다고 정말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감정들은 흩어지고, 분노는 옅어지며 그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되고, 상처가 아물어가면서 서서히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이기에 상처를 주고 받는다.
남이었으면, 그 상처를 준 상대방에게 똑같이 상처를 주려고 하거나 떠나거나 상종도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는 가족이기때문에, 똑같이 상처를 주려고 하지 않고, 그들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가끔은 이것이 인간관계인가 생각하면서도, 사랑인가 생각한다.
이 독후감의 앞쪽에서도 써내려간 글이긴 하지만, 사랑은 그자리에 있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내가 가끔 멀어지려고 할때, 끊어 내려고 할때에도 그 자리를 항상 지켜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엄마도 나에게 준 상처가 왜 없겠는가.
우리 할머니도, 우리 고모도, 우리 아빠도, 우리 외숙모도, 외삼촌도...
모든 사람은 상처를 주고 받는다.
하지만 다른 한가지 사실은 가족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연은 길고, 그 긴 인연들 사이에서 시간은 흐르고, 그러면서 상처는 아물어지고 우리는 다시 만나 웃으며 대화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순일을 그렇게 괴롭히고 고생을 시키던 그녀의 외할아버지에 대해서도, 이순일은 처음에는 증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했던 말한마디로 아픔을 씻어내고 살아간다.
이 책의 끝에 저자가 이런 말을 남겨두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가족 이야기로 읽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가족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 연이기 때문에 잠시 멀어지더라도 다시 모이게 된다.
한영진, 한세진, 이순일
이 책은 가족 구성원 중 여성들의 목소리를 낸 소설이고 가족 내에서 받은 여성으로서의 상처들을 표현하고 있는 책이다. 그들이 각각 여성으로서 받은 상처들을 편안하게 잘 풀어내고 있고 분노하거나 강한 어투 없이도 그들의 감정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좋은 글들이 담겨있다.
우리 여성들은 남성들 보다 훨씬 예민하기에, 남자들이 느끼지 못하는 사소한 감정의 변화들을 이해할 수 있고, 그렇기에 가족 내부에서 남자들보다 더 많은 상처를 받는다고 느끼고, 그렇게 마음에 담고가는 부분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도 여성으로서 받은 여러가지 상처들이 나와있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들은 나름대로 서로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
살아내기 위해서,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 그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마음' '최선' '회복'
이 세가지 단어들이 떠올랐다.
당연히 큰 상처들은 마음이 동하다고 해서 해결되는 부분이 아닐 수 있지만, 우리는 우리 엄마를 이해하기에, 그리고 우리 언니를 이해하기에, 계속해서 가족으로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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